누군가의 ‘자식’으로 태어난다. 그리고 태어난 성별에 따라 ‘남/녀’를 가른다. 같은 부모 아래에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/그녀의 ‘동생’이 된다. 또 시간이 흘러 나보다 늦게 태어난 동생에게는 ‘형/오빠/누나/언니’가 되리라. 좀 더 자라나면서 누군가의 ‘손자/손녀’임을 알아채거나, ‘조카’나 ‘사촌’임을 깨닫게 된다. 학교에 들어가게되면 ‘학생’이 된다. 관계가 넓어지고 성장할 때마다 ‘친구’, ‘후배’, ‘선배’, ‘지인’, ‘직원’, ‘상사’, ‘고객/종업원’, ‘멘토/멘티’, ‘회원’이 되고, 누군가의 ‘연인’을 넘어 ‘배우자’가 되어 어느 순간에는 ‘아빠/엄마’가 되겠지.
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역할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며, 그 역할들이 해야하는 일들은 나를 이쪽으로 저쪽으로 옮겨 놓는다.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. 그리하여 ‘나’는 실종됐다. 아주 심하게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대충 잡아 땡겼다가는 꼼짝없이 묶여버려 풀 수 없게 되어버린다.
때로는 이런 역할이나 관계들을 최대한 벗어나 나 자신을 돌아보려 노력하기도 한다. 하지만 자기가 가진 눈으로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다. 자신의 두 귀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. 자신의 체취를 느낄 수 없다. 자신의 생각을 자기 스스로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.
어쩌면 진짜의 ‘나’는 없거나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. 내가 스스로 ‘자의식’을 느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. 운이 좋아 찾게 된다면 다행이지만, 원래 없는 것이라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.